이미지 과잉과 시뮬라크르
현대사회는 이미지 과잉이라는 키워드로 표현될 수 있다.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쏟아지는 무수한 이미지와 기호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존재 양식이 되었고, 실재(實在)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는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우려를 낳았다.
그가 설명한 가장 유명한 개념은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물을 말한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영화 속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본에 따라 가상으로 꾸며진 세계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실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체물은 그 자체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러한 이미지에 의해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실재와 복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에 적용되기에, 시뮬라크르는 예술에도 적용된다.
불확실한 미래의 시대
<블랙스완: 예기치 않은 미래>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던 판데믹같은 사건이 유발하는 심각한 영향과 이러한 사건을 설명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불가능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상황의 출현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보호하고 신뢰하는 모든 가치가 전복되는 가능성에 집중한다.
전시는 오픈미디어아트페스티벌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했다. 오늘은 세 그룹의 작가들의 세 가지 작품을 통해 시뮬라르크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권병준
권병준은 1990년대 초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고, 얼터너티브 록에서부터 미니멀 하우스를 포괄하는 6개의 앨범을 발표한 전력이 있다. 이후 2000년대부터는 영화 사운드트랙, 패션쇼, 무용, 연극, 국악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선보였다.
2005 년부터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실험적인 전자악기 연구개발 기관인 스타임 STEIM 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활동하였고 2011 년 귀국 이후 현재까지 소리와 관련한 하드웨어 연구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악기, 무대장치를 개발, 활용하여 극적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음악, 연극, 미술을 아우르는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기획 연출하고 있다.
풍경 그리고 풍경, Windbell and Landscape (2020)
긴 잔향과 함께 전달되는 전동 풍경(風磬, Wind-bell)을 이용한 소리실험이다. 알루미늄 파이프로 제작된 16개의 풍경은 전동으로 움직이며 공간 내 관객의 위치에 따라 원거리 제어되어 화음을 이루며 공간의 소리 풍경(風景)을 만든다.
2014 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개관전에서 선보인 동명의 멀티채널 사운드인스톨레이션에서 들려주었던 한국 전통 범종의 맥놀이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으며 16 개의 풍경은 한국 전통 악기 편경(編磬)의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주제이기도 한 맥놀이는 유사한 주파수의 소리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소리로 합쳐져 진폭이 주기적으로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진동의 진폭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풍경의 소리는 진동을 이용한 음향 그 자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실재가 진동하는 진짜 소리와 미리 녹음되어 재생되는 복재의 소리를 구분하기 어렵다.
위 영상에서 작가는 맥놀이를 이용한 풍경의 소리는 종에서 느낄 수 있는 불교적 명상의 종 소리, 동양적인 소리, 혼을 달래는 느낌의 소리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에서 출발한 풍경 소리(복재)가 종(실재)을 능가하는 현상, 복재가 복재가 아닌 원본이 되고, 복재와 원본의 차이가 사라지는 현상을 시뮬라르크의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초과 실제)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다니엘 이레귀(Daniel Iregui)
다니엘 이레귀는 콜롬비아 출신 퀘벡 작가로 몬트리올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진화하는 예술 작품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인터랙티브 디지털 설치 작품을 제작한 바 있다.
디지털 시스템이 관람객이 움직이거나 조작함에 따라 달라지는 무한하고 무작위적인 조합을 예술의 주제로 사용한다. 그의 인터랙티브 작품은 기술적 도구를 향한 관람객들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적, 음향적 경험을 제공한다.
항체 ANTIBODIES (2020)
판데믹의 영향으로 강요된 언택트 사회는 인간이 현재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지, 그 거리감을 작품을 통해 반영한다. 현실적 상호작용의 친밀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거대한 플랫폼들 앞에서 우리 존재의 취약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항체 앞에서 관객은 이러한 현상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플랫폼을 모방하면서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은채 작품에 참여한다. 작품 내의 인터랙션 기술이 대화를 듣고, 움직임을 추적하고 행동을 연구함에 따라 우리는 완전히 노출되며, 얼굴의 모든 움직임을 따라가는 오버레이 그래픽으로 선명하게 시각화함으로써 온라인이 가질 수 있는 위험을 전달한다.
이를 시뮬라크르로 가정해본다면, 실재하지 않는 미디어상의 복제된 관객과 대면하며 스스로 원본성을 깨닫게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에서 유일무이하게 현존하는 것은 작품 내의 복제된 데이터가 아닌, 개개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 사이트에서도 작품과 관련된 상호작용을 경험 할 수 있다.
스튜디오 8 (Studio 8)
스튜디오 8은 무용과 공연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르단의 비영리 기업으로, 춤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국제 및 지역 파트너 네트워크와 함께 지역 신진 아티스트를 위한 작품 지원, 제작, 발표를 통해 스튜디오 8은 요르단을 중심으로 무용문화의 혁신, 실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The Unwritten New Normal (2020)
판데믹 격리 상황에서 탄생한 공연으로, 3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두 예술가는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는 창의력으로 공연 제작에 도전했다. 요르단인 안무가 겸 퍼포머인 아나스 나흘레와 독일의 시각예술가 겸 사회학 연구자 스테파니 뮐러가 공동 제작하였고, 이메일, 왓츠앱, 페이스북 그룹 등을 통해 한 달 동안 온라인으로 교류하며 제작했다.
이번 공연은 정치 · 예술 · 문화 · 교육 · 헬스케어 · 경제 · 국경통제에 쓰이는 보편적 대상인 종이(Paper)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종이는 자신의 형식을 버리고 아름다운 미래와 쓰이지 않은 시를 여는 백지 프로젝션 스크린으로 변신한다. 그렇게 음악, 사운드 아트, 댄스, 섬유 아트, 설치 아트, 프로젝션 아트를 포함한 매우 특별한 퍼포먼스가 탄생했다.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아나스 나흘레가 필요로 했던 것은 일시정지이다. 단절하고, 생각하고, 정상성에 대해 궁금해하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상상하고, 새로운 정상성이 어떤 모습일지 탐구하는 순간이다.
그와 동시에 스테파니 뮐러는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정상을 정의할 특권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와 더불어 정상성의 경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생각을 행위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각각이 가진 실재를 찾아 나서는 활동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그들이 가진 정상성의 의견은 다르며, 이는 불확실한 판데믹의 상황처럼 변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정상성 그 자체의 실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정상성은 시뮬라르크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맺는말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능력인 미디어 독해력(media literacy)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측할 수 없는, 가상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 실재를 찾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할 것이다. 이는 미디어아트가 이미지를 통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예술의 해석과 철학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의견은 모두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관객이 메시지를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의 오리지널리티, 그것이 개개인의 오라(Aura)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있고, 미디어아트는 언제나 말을 걸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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